고대 무나카타 가문의 분묘군 ― 신바루ㆍ누야마 고분군 ―

오키노시마 섬의 고대 제사는 고도의 항해기술을 지니며 대외교류에 종사한 고대 호족 무나카타 가문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고대국가가 제사에 관여하게 됨에 따라 이윽고 그들은 무나카타타이샤의 세 신사에서 무나카타 세 여신을 모시게 됩니다.
신바루ㆍ누야마 고분군의 모습
신바루ㆍ누야마 고분군의 모습

현대까지 이어지는 오키노시마 신앙의 전통을 구축한 무나카타 가문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물증이 5~6세기에 만들어진 신바루ㆍ누야마 고분군입니다.
무나카타 지역은 옛날에는 크게 내해가 펼쳐진 해안부와 오키노시마 섬 사이에 위치하는 오시마 섬 등으로 바다와 일체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무나카타 지역의 내해 범위와 대형 고분의 분포
무나카타 지역의 내해 범위와 대형 고분의 분포
Tomb 25 (late 5th century)
25호분(5세기 후반)
Tomb 22 (late 5th century)
22호분(5세기 후반)
Tomb 7 (5th century)
7호분(5세기)

신바루ㆍ누야마 고분군은 옛날의 내해에 면해 있으며 본토에서 오키노시마 섬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대지 위에 전방후원분과 원분, 방분 등 크고 작은 다양한 양식의 고분들로 밀집해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외교류의 무대가 된 바다에서 활약하며 오키노시마에 대한 신앙을 도맡아 키운 무나카타 지역의 고대 호족의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Tomb 34 to 38 (late 6th century)
34~38호분(6세기 후반)
Tomb 12 (early 6th century)
12호분(6세기 전반)

요배의 전통과 금기

오키노시마 섬은 성스러운 섬을 지키기 위한 엄중한 금기 등 신앙에서 비롯된 전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대부분 고스란히 지켜져왔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오키노시마 신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살아 있는 것입니다.
18세기가 될 때까지 오시마 섬 북쪽 해안에 만들어진 오키쓰미야 신사 요배소는 평소에는 들어갈 수 없는 오키노시마 섬을 멀리서나마 배례하기 위한 신앙의 자리입니다. 이 신전은 섬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오키노시마 섬에 대한 배례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무나카타타이샤 오키쓰미야 신사 요배소
무나카타타이샤 오키쓰미야 신사 요배소

 고대제사를 지내지 않게 된 후는 활발한 대외교역으로 번성한 무나카타 다이구지 가문이 신앙을 지켜왔으며 다이구지 가문이 단절된 16세기말 이후에도 신관과 지역 사람들이 그 신앙을 지탱해 왔습니다.
 오키노시마 섬 주변에서는 무나카타 지역 사람들의 어업활동이 시작되어 17세기부터는 경계 해역을 경계하기 위한 보초가 섬에 주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도 오키노시마를 '신이 깃든 섬'이라 하여 함부로 섬에 들어가거나 물건 반출 금지 등 엄격한 금기를 지켰습니다. 이러한 금기는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키노시마의 금기

'오이와즈사마'
오키노시마 섬에서 보고 들은 것은 일체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사람들은 오키노시마를 '오이와즈사마(不言樣)'라고 부르는 등 경외하는 마음으로 현대까지 지켜 전해왔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 한 개라도 가지고 나와서는 안된다'
오키노시마에서는 일체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에도시대에는 이를 어겨서 지벌을 입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키노시마의 고대 제사유적은 거의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고스란히 지켜진 것입니다.
'상륙 전의 미소기'
오키노시마 섬은 무나카타타이샤 신사의 사유지로 평소 상륙은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일 의식을 거행하는 신관이라도 먼저 반드시 옷을 모두 벗고 바다에 몸을 담가 심신의 부정을 씻어내지 않으면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미소기의 모습
미소기의 모습